우리나라 농구경기의 도입과 발전

우리나라 농구경기의 도입과정


우리나라에서 농구경기는 1907년 당시 황성 기독청년회의 초대 총무였던 미국인 질레트(Gillett, P. : 한국명 吉禮泰)에 의해 처음으로 소개되었다. 그러나 질레트가 1908년 5월 본국으로 귀국함으로써 지도 보급이 중단되었다가 1916년 3월에 미국인 선교사 반하트(Bernhart : 한국명 河)가 다시 황성기독청년회 간사로 취임하게 되면서 본격적인 지도 보급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한국에서 1916년 보급이 시작된 것과는 달리 한국인들이 본격적으로 농구경기를 접하게 된 것은 일본 유학생들에 의해서다. 미국인들에 의해 국내에 소개된 것과는 달리 1907년 당시 일본 東京에서 유학하고 있던 유학생들이 하계 방학을 이용하여 귀국하게 되면서 농구경기가 국내에서도 행해지게 된 것이다.

귀국한 유학생들과 황성기독청년회 회원 및 서양인들의 연합 팀과의 농구경기가 처음으로 훈련원에서 거행되었는데 이것이 우리나라에서 가졌던 농구적인 첫 대회이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우리나라에 거주하고 있는 서양인들과 기독청년회 회원들이 중심이 되어 농구 지도보급이 시작되게 되었다.

 

우리나라 농구경기의 발전사


농구경기의 정기전은 192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20년 3월 12일 중앙 기독청년회 회관에서 서양인 팀과 중앙 기독청년회 회원과의 경기가 있었는데 경기 자체의 매력에 빠진 많은 관중들의 재경기 요청에 의해 3월 16일에 재 시합이 거행되었다. 이것이 효시가 되어 이 두 팀간의 농구경기가 연례행사로 발전하게 된다. 이 같은 연례적 행사를 통하여 보급 발전된 농구경기는 그 후에 학교체육과 사회체육 부문에 크게 기여하였다. 또한 그해 4월에 중앙 기독청년회 농구단은 일본에 원정경기를 갔었는데 당시 일제 침략기라는 시대 상황으로 보아 해외 원정경기는 아니었지만 한국인만으로 조직된 팀이 일본에 가서 경기를 하였다는 사실은 농구경기 해외 원정의 효시가 되었다고 보는 것도 무방할 것이다. 이 때의 전적은 2승 3패로 패하기는 하였지만 이 같은 해외 원정이 계기가 되어 농구경기의 보급과 발전에 이바지한 바가 크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1925년 여러 가지 사정에 의해 침체 상태에 빠져있던 중앙 기독청년회 농구단은 국내 농구경기의 붐을 다시 불러일으키고자 국내 농구대회를 개최하게 되었다. 이 경기대회에서 서양인 여자 팀과 이화학당 여학생들의 농구경기가 오픈 경기로 개최되어 10대 0으로 이기게 되었는데 이것이 우리나라 여자 농구의 첫 시발점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해 9월에 조선 바스켓볼협회가 창립되어 이를 계기로 농구기술의 향상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특히 주목할 일은 해외 팀의 초청 경기와 외국인 코치에 의한 농구 강습회가 빈번하였다는 것이다. 1926년 1월에는 중앙 기독청년회 체육부의 초청을 받은 당시 일본 대학 농구의 명문고인 와세다 대학과의 친선경기가 개최되어 4전 4승의 성적을 거두었다. 이 친선경기는 경기 자체에서 승리를 했음보다 우리나라 사람들로 조직된 팀이 일본 사람들과 친선경기를 가졌다는 사실과 국내에서 개최하였던 국제 경기의 효시가 되었다는 점에서 더 큰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이듬해 1927년에 당시 일본 東京에 기독청년회 체육부 간사이며 농구와 배구의 권위자인 브라운(F. H. Brown, 1882-1973)을 초빙하여 경성 기독청년회 회관에서 강습회를 개최한 바 있다. 이 때의 강습은 농구 이외에 배구 기술 강습도 함께 실시하였는데 이 같은 강습회는 외국의 유수한 지도자에 의한 경기기술의 보급을 통하여 국내 스포츠의 국제적 발돋움을 시도하였다는데 의의를 가질 수 있으며, 특히 농구기술의 눈부신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고 평가된다.

그 후 국내 각급 학교의 농구 팀은 발전을 거듭하여 일제 침략기 나라 잃은 설움을 떨치려는 듯 일본 농구계를 석권하게 된다. 농구가 바로 극일(克日)의 횃불이 된 것이다. 아직도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성과는 1936년 1월에 개최되었던 전 일본 남자종합농구선수권대회 겸 올림픽대회 파견 예선 대회에서 연희전문 농구팀의 우승이다. 이로 인하여 제11회 베를린 올림픽대회 전 일본 농구선수에 장이진, 이성구, 염은현 등 세 선수가 참가하게 되었으며, 이 같은 일은 일제의 억압이라고 하는 불우한 역경을 극복하면서 세계 만방에 우리 민족의 우수성을 과시할 수 있었던 기회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1945년 조국의 광복과 더불어 모든 스포츠가 새로운 의욕으로 발전하게 되었으며, 일제의 역경 속에서도 찬란한 금자탑을 이룩한 농구계는 더욱 활발한 움직임을 보였다. 특히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출전하게 된 제14회 런던 올림픽대회에서는 농구 팀도 참가하여 세계열강과 치열한 접전 끝에 제8위의 성적을 거두기도 했다. 비록 6.25 동란의 시련을 맞아 의욕적인 스포츠활동이 일시 정지되기도 했으나 전을 자랑하는 농구는 곧 시련을 극복하고 발전을 거듭하게 되었다. 특히 1954년 월 한국 여자농구선수단은 자유중국에 5승 2패의 기록을 가지고 개선한 것을 비롯하여, 제4회 아시아 농구대회에서의 4위, 대한농구협회 주관의 빅토리 농구단의 두 차례 내한경기, 배재고에서 거행되었던 미국 오레곤 대학 농구 팀의 친선경기, 자유중국의 극난, 양우 팀 및 필리핀의 세븐업 농구단 등과의 대전은 우리 농구계에 크게 활력을 불어넣어 준 잊을 수 없는 국제친선대회였고, 1984년 LA올림픽대회에서는 구기종목 사상 처음으로 은메달을 획득하는 쾌거를 거두기도 했다.

이같이 우리나라의 농구는 다른 어떤 운동경기보다 국내·외적으로 눈부신 활동을 전개해 왔으며, 그 업적도 대단하다. 특히 최근에 스포츠 한국의 명예를 세계만방에 과시함에 있어서도 농구의 역할은 대단하여 더욱 발전할 것이라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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