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회 1932 레이크플래시드 동계올림픽 (미국)

제3회 1932 레이크플래시드 동계올림픽


 

제3회 동계올림픽이 1932년 2월 4일~2월 13일까지 미국 래이크플래시드에서 열렸다. 앙리 드 바이에라투르 공작이 여전히 IOC 위원장이며 쥐스티니엥 드 클라리 공작은 프랑스 올림픽위원회 위원장이었다. 미국에서 처음 열리는 이 경기에는 252명(남 231, 여 21)의 선수가 참가했다. 대회 개막식은 차기 미국 대통령이며 뉴욕 주지사 프랭클린 루즈벨트가 주재했고, 선수선서는 빙속 선수인 잭 셰어(Jack Shea)가 했다.

10일간의 대회 기간 동안 4개 스포츠 17종목 경기가 치러졌다. 80,000명의 관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모두 합하여 42개의 메달이 수여되었다. 하계올림픽을 개최한 미국이 동계대회를 개최하는 우선권을 갖고 있었다. 이에 따라 뉴욕 주 북쪽에 자리 잡은 작은 도시인 레이크플래시드가 제3회 동계올림픽대회를 개최하도록 IOC의 지명을 받았다. 이 당시만 하더라도 미국에는 유럽과 같은 동계스포츠시설이 없었다. 이런 실정이 아마도 이번 올림픽이 완전히 실패한 원인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눈이 내리지 않았기 때문에 조직위원회는 마지막 순간에 캐나다와 인접한 국경에서 기차로 눈을 싣고 오도록 했다.

이제는 거리가 문제되지 않는 시대가 되었지만, 1932년만 하더라도 미국까지의 거리가 너무 멀어 많은 나라들이 대표단 수를 줄이거나 심지어 불참하기도 했다. 앞서 열린 생-모리츠 대회에서는 미국선수 28명을 포함하여 25개 나라 464명의 선수가 경기에 참가했는데, 레이크플래시드 대회에는 모두 252명의 선수가 참가했고, 그 가운데 미국선수가 77명을 차지했다. 이 같이 참가선수 숫자가 줄어든 데에는 스켈레톤 종목 하나가 제외되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경기는 봅슬레이와 스케이팅, 스키 그리고 아이스하키 등 4가지 스포츠 종목에서 이뤄지고, 3가지 시범종목도 펼쳐졌다. 시범종목 가운데 개가 모는 썰매경기와 여자빙속경기는 곧 동계올림픽대회에 포함되었지만, 컬링이 정식종목이 된 것은 나가노에서 열린 제18회 동계올림픽이었다. 1928년 44명이었던 프랑스 대표단은 여자 1명을 포함한 8명으로 줄어들었다.

기상과 거리문제에 더하여 경기운영이 부실한데에다 스포츠정신이 지켜지지 않았다. 특히 남자빙속에서 1924년과 1928년 3관왕에 올랐던 핀란드의 클라스 툰베리가 경기 참가를 거부했다. 미국이 두 명씩 출발해서 측정시간으로 등수를 결정하는 대신 모두가 출발선에서 함께 출발해서 등수를 정하도록 한 것이 화근이었다. 신기한 것은 미국 대표로 •서 500m와 1,500m에서 우승한 잭 셰어와 5,000m와 10,000m에서 우승한 역시 미국 대표인 어빙 재피(Irving Jaffee)가 이 규칙으로 재미를 봤다는 것이다. 스칸디나비아 대표들은 부진해서 베른트(Bemt) 덕분에 500m, 발랑루(Ballangrud) 덕분에 10,000m에서 시상대에 올랐을 뿐이다.    무료스포츠중계

한편, 생모리츠 대회가 끝난 다음, 프랑스 스케이트 스타선수가 된 앙드레 졸리와 피에르 브뤼네가 결혼하게 되었다. 이 부부는 프랑스 스케이팅의 가장 대단한 커플 자리에 올랐다. 이제 브뤼네 성을 갖게 된 앙드레 졸리는 1921년에서 1930년 사이 10개의 프랑스 여자챔피언 타이틀을 차지했고, 피에르 브뤼네는 6개의 프랑스 챔피언 타이틀을 갖게 되었다. 1928년 올림픽 첫 타이틀과 함께 개인전에서 몇 번에 걸쳐 명예스런 자리를 차지하게 된 다음, 이 전설의 커플은 혼성경기에서만 스케이팅을 했다.

2월 12일 금요일 저녁, 그들은 최초의 실내 아이스링크 가운데 하나에서 경기에 나섰다. 미국사람들은 이 스케이팅 선수들의 연기를 감상하기 위해 모여들었고, 아이스링크는 금방 사람들로 가득 찼다. 브뤼네 부부는 멋진 실력을 보여주었고, 그들이 퇴장할 때에 관중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환호했다. 그들의 연기는 안정감과 확신, 세련됨과 우아함이 물씬 풍겼다. 그들 다음에 미국 커플이 나와 역시 관객을 사로잡았다. 하지만 승리의 월계관은 연속 두번의 올림픽대회에서 프랑스의 커플에게 돌아왔다. 이 두 번째 금메달은 오랫동안 경력을 쌓아 최정상에 이른 결과였다. 이후로 브뤼네 부부는 미국 미시간에 정착하기로 결정했다. 그곳에서 스케이트 학교를 열어 재능을 쏟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수많은 스케이트선수들을 배출했을 뿐 아니라 1960년 스쿼밸리에서 올림픽챔피언이 된 미국선수 캐럴 하이스(Carol Heiss), 역시 1960년 개인경기에서 3위에 오른 캐나다선수 도널드 잭슨(Donald Jackson), 혹은 1984년 사라예보에서 올림픽챔피언이 된 미국선수 해밀튼 스콧(Hamilton Scott)처럼 그들과 함께 연습하기 위해 온 챔피언들도 가르쳤다.

루드(Ruud) 일가에 스키점프 경기는 가족사다. 이미 1928년 어린 시그문(Sigmund)은 중간도약대 특별점프에서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이들이 점프에 대해 매력을 느끼게 된 것은 오슬로에 가까운 노르웨이의 지방인 홀멘콜렌에 대한 애착에서 비롯된 것이 분명하다. 그들은 이곳에 있는 노르딕스키 도약대에서 연습했다. 톨레이프 헤우와 같은 많은 챔피언들이 이 유명한 곳에 있는 낡은 나무 도약대에서 연습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비르이르 루드(Birger Ruud)가 레이크플래시드에 왔을 때, 그의 나이는 갓 스무 살이었는데, 이 종목의 세계 최고에 속한다는 축으로 분류되었다. 그는 이런 기대를 실망시키지 않고 노르웨이 출신 다른 두 명의 선수를 제치고 첫 번째 올림픽 타이틀을 따냈다. 경기는 우여곡절 끝에 치러졌다. 그 전날, 기상조건 때문에 시합이 거의 무산되기 일보 직전이었다. 2월 12일 아침이 되어 진행자들은 경기를 열도록 결정했다. 시합에 돌입했지만, 비가 오락가락했다. 선수들은 수영장으로 변한 점프 코스에 그럭저럭 들어섰다. 그런데 비가 온 위에 한파가 닥치는 바람에 선수들은 점프대 높은 곳에서 얼어붙는 듯 했다. 이런 끔찍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루드는 두 번째 시도를 멋지게 성공해서 1위 자리로 치고 올랐다. 그에게 느낌을 묻는 호기심 많은 기자들에게 루드는 환하게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다음 번에는 구명대를 차야겠어요. 수영을 할 줄 모르니까요!"

이듬해, 그는 인스부르크에서 84m가 넘는 점프 기록을 수립하는 데에 성공했고, 1934년 유고슬라비아의 플라니카에서는 92m 점프에 성공함으로써마(魔)의 90m 벽을 최초로 넘게 되었다. 노르웨이 출신의 챔피언은 다음 올림픽경기에서도 스웨덴 선수 에릭손(Eriksson), 같은 노르웨이 선수 안데르센(Andersen)을 누르고 올림픽 타이틀을 지키는 데에 성공한다. 그의 재능은 세월과 전쟁을 거침없이 가로질러, 16년이 지난 1948년 생모리츠에서 네 번째 메달을 목에 걸었다. 이번에는 은메달이었다. 자신의 이런 화려한 올림픽 성적 위에다. 루드는 1931년 1938년 사이에 걸쳐 수많은 세계 타이틀을 더했다.

젊은 미국선수인 어빙 재피는 자신의 10,000m 타이틀을 지키는 능력을 과시했다. 4년 전, 그는 빙속 경기에서 괴력을 가진 스칸디나비아 선수들을 우승자리에서 끌어내렸다. 1928년, 그가 10,000m에서 우승한 것은 미국선수가 화려하게 전면에 나섰다는 것을 알리는 신호였다. 그보다 앞서 1924년 이미 미국선수 찰스 주트로는 500m 경기에서 노르웨이 선수들을 2, 3등으로 밀어내고 우승을 낚아채었다. 어빙 재피는 결승선 가까이서 불운한 베른트 에벤센(Bent Evensen)을 앞질렀다. 베른트는 승리가 도망가는 것이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었다. 1932년 어빙 재피가 거둔 여러 차례 우승은 논란 속에 차지한 것이 많다. 동계올림픽이 열리기 전, 국제빙상연맹(ISU)은 경기규칙을 수정키로 결정했다. 경기는 두 명씩 계속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출발선에서 출발하도록 하였다. 당시 빙속의 최고 선수였던 핀란드 출신 클라스 툰베리는 이런 경기의 출발선에 서는 것을 거부했다. 그렇게 하면 출발 즉시부터 선수들이 팔꿈치를 휘두르기 때문에 쓰러져 넘어진 채로 경기를 끝내는 선수도 생기기 마련이었다. 신기하게도 두 명의 미국 선수가 네 경기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500m와 1,500m는 잭 셰어가, 5,000m와 10,000m에서는 어빙 재피가 이름을 남기게 되었다. 이런 언짢은 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빙 재피는 오래 전부터 스칸디나비아 선수들이 장악하고 있는 스포츠 종목에서 두 번의 올림픽경기에 참가해서 세 개의 금메달을 차지하는 대단한 능력을 보여주었다.

1928년부터 여자 피겨스케이팅 경기에서는 소냐 헤니가 우승자 명단 일등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습관처럼 되다시피 했다. 레이크플래시드에서 소냐 헤니는 생모리츠에 이어 연속해서 두 번째 금메달을 차지하면서 새로운 능력을 펼쳤다. 당시 그녀는 20세였다. "빙판의 요정"은 인조빙판으로 된 실내 링크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가 링크에 들어서자 미니스커트와 비단스타킹을 익숙한 듯 착용한 젊은 여자를 보고 반한 관중의 박수갈채가 터져 나왔다. 그녀의 연기는 생모리츠에서보다 더 발전했다. 소냐 헤니는 자기 기술의 정점에 올라있다는 느낌을 주었다. 그녀는 고난도로 알려진 점프를 하면서도 자연스러움의 원칙을 더욱 두드러지게 보여주는 것 같았다. 그녀의 성공은 대단한 것이었고, 더욱 가뿐하게 우승을 차지했다. 관중은 그녀에게 감동적인 경의를 표시했다. 1932년 2월 10일 저녁은 이 노르웨이 여자선수에게 인생에서 위대한 순간으로 남을 것이며, 이날의 승리를 계기로 그녀는 시대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여자 피겨스케이팅 챔피언으로서 황금으로 새긴 그녀의 이름을 남기게 되었다. 1928년과 마찬가지로 오스트리아 선수인 프리치 부르는 2위 자리에 만족해야 했으며, 미국 선수 매리벨 빈슨(Maribel Vinson)은 동메달에 만족해야 했다.

미국은 6개의 금메달, 4개의 은메달 그리고 2개의동메달을 합쳐 12개의 메달을 따내 참가국 가운데 1위를 차지했다. 그렇게 해서 미국은 10개의 메달을 차지한 노르웨이를 제쳤다. 이번 대회는 지난번 대회와 약간 비슷한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시시각각 주최측은 경기를 취소하거나 변경할 준비를 하고 있어야만 했다. 그 정도로 기상조건이 나빴다. 여기에다 경기 편성과 진행에 관한 문제가 더해졌다. 국제빙상연맹이 미국인들에게 선수들 모두가 같은 선에서 출발하는 것을 허용한 빙속경기와 마찬가지로, 스키점프경기 또한 비 때문에 트랙이 변질되는 등의 이유로 인해 경기진행에 불확실성이 팽배했다. 봅슬레이 경기에서는 스포츠정신의 부족이 드러났다. 미국의 형제 선수들인 휴버트와 커티스 스티븐스(Hubert and Curtis Stevens)는 첫 번째 회전에서 저조한 성적을 보였지만 아세틸렌 램프를 사용해서 봅슬레이를 변형시켰다. 그 결과 그들은 경기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이 일이 일어난다음, 장비를 변형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미국의 4인조 봅슬레이도 마찬가지였다. 선수들은 보다 날카로운 활주날을 사용해서 그들의 봅슬레이를 쾌속으로 변형시켰다.

비 때문에 트랙이 사용할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는 바람에 경기진행이 위험한 상태였다. 독일선수들 네 명은 심한 부상을 입고 경기를 끝내야 했다. 결국 미국은 이 동계올림픽대회와 경기장에 관해 다른 나라에 좋은 기억을 안겨주지 못 했다. 그런데도 1980년에 이곳에서 제13회 동계올림픽이 다시 열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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